[투데이T] 노동 현장에서 당연한 부수적 피해는 없다

[투데이T 김정규 기자] 달라진 것은 없었다. 기대조차 순수했다. 두렵다는 엄살만 넘쳤을 뿐 그로 인한 안전 조치는 시행되지 않았다. 지난달 말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지 한 달도 안 됐지만 6건의 중대재해가 발생했다. 경기 양주 삼표산업 채석장 토사 붕괴사고, 성남 신축공사장 승강기 추락, 전남 여수 여천 NCC 화학공장 폭발, 두성산업 창원공장 독성물질 급성중독 사고 등이 연이어 터졌다. 숨지고, 다치고, 중독에 따른 피해는 그 결과와 가족의 상처를 가늠하기 어렵다.
이러자 정부 부처는 다급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1일 삼표산업 전국 사업장에 대한 특별감독에 들어간 한편, 두성산업 대표이사는 입건, 중독 관련 물질을 제공한 기업들에 대해선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고강도 조치를 통해 경각심을 높이기 위한 조치이지만 그 결과 또한 ‘용두사미’가 되지 않을지 우려의 목소리도 많다.
최근 법무부와 검찰이 연일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 강경하게 대처해야 한다”며 굳은 처벌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사고 책임자에게 합당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김오수 검찰총장은 “엄정히 대처해야”한다며 합을 맞췄다.
그러나 기업들의 생각은 다르다.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전국 10인 이상 1112개 기업을 대상으로 ‘2022년 기업규제 전망조사’를 실시한 결과, 대부분의 기업들이 중대재해처벌법을 가장 부담이 큰 규제로 꼽았다. 특히 현장 위험도가 높은 반도체, 철강, 조선·해운, 건설 등 8개 업종이 부담을 다른 업종보다 크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옥죄는 모습이고 기업은 조건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모양새다. 대통령 선거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대선 유력 주자들도 중대재해처벌법에 높은 관심을 나타내지만 기업 눈치보기와 노동 생명권의 존중 사이에서 자신만의 명확한 길을 찾기는 역부족처럼 보인다.
여느 시행법이 그렇듯 모두를 만족할 법안은 애초부터 없었다. 이제 담당부처 간, 이해당사자 간 생각의 차이, 현실 인식의 차이는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당연한 안전보건 의무 수칙 준수를 정치적 시험대에서 저울질하는 지경에 이르게 할 것이다. 향후 사상자가 속출한다 해도 이를 위한 안전보건 체계를 구축하는데 필요한 ‘정치경제적 합의’의 시간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뒤집어씌워 지난한 시간을 보낼 것 또한 자명해 보인다. 가장 중심이 돼야 할 생명 존중에 대한 논의보다는 처벌의 경중과 이익에 기반한 손익계산이 분주해 질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게 예상이 가능하다.
중대재해처벌법이 논란이 되는 근본적 이유는 ‘처벌’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담에 있다. 이제껏 그래왔고 인재(人災)든 천재(天災)든 산업 현장에서의 산업재해가 어쩔 수 없는 ‘부수적 피해’로 인식해 왔던 기업들의 관행적 사고의 틀에서 불가피함이 처벌의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한 최고책임자의 현장 안전을 위한 결정과 경비 처리는 언제든 주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걱정에 못을 박듯 시행법의 최고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지난 18일 수원지검 평택지청에서 열린 ‘중대재해사건 실무자 간담회’에 참석해 “중대재해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선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며 “사고 발생에 대해 책임자들이 합당한 처벌과 형량을 선고받게 하는 것이 사고를 줄이는 길”이라고 단언했다.
합리적 기준에 따른 처벌 강행 의지를 보여준 발언으로, 산업재해의 반복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흔들리지 않을 안전보건 시스템을 위한 유일한 길이 설사 최고책임자의 두려움에 기반한 안전 체계 구축이라도 우리는 가야만 함을 시사하는 표현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앞으로도 중대재해처벌법을 두고 ‘사고(事故) 간극’은 존재할 것이고, ‘사고(思考)의 간극’도 계속 논쟁의 여지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처벌이 솜방망이가 되면 피해자와 가족들은 분노할 것이며, 처벌의 강도에 따라 기업들은 법의 실효성과 맹점을 계산해 입맛에 맞는 법 개정을 요구할 것이다.
설사 여러 간극이 존재한다 해도 분명한 것은 하나가 있다. 아무리 위험한 노동 현장에 있더라도 안전하게 일하고 싶은 노동자의 간절한 마음은 처벌이라는 ‘서슬 퍼런 칼날’에 최고책임자의 두려움 정도는 또 다른 부수적 피해 정도로 치부돼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생명을 경시하는, 현장 안전을 위협하는 정서적 부담은 노동이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의지와 절대로 등가의 가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입법 추진 의지가 ‘노동자를 지키는 칼’로서 무뎌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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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것은 없었다. 기대조차 순수했다. 두렵다는 엄살만 넘쳤을 뿐 그로 인한 안전 조치는 시행되지 않았다. 지난달 말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지 한 달도 안 됐지만 6건의 중대재해가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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